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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홀로 찾은 프랑스 안시(Annecy)에서
    나홀로 유럽 여행기/프랑스(France) 2021. 11. 1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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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날은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리옹에서 안시로 떠나는 기차의 출발 시간은 오전 9시 8분, 잠옷을 벗어 던지고 여행 내내 함께한 빛바랜 청바지와 반팔 티셔츠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얼마 전 지베르니에서 산 모네의 수련이 그려진 에코백 안에 필름카메라와 필름들을 챙겨 넣었다.

    ​리옹역에 도착했는데 아직 기차 플랫폼이 뜨질 않았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침으로 먹을만한 것들을 사기로 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와중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냄새의 정체는 바로 갓 구운 크로아상! 이 냄새를 맡고 안 살 수는 없지, 나는 크로아상과 에스프레소 세트를 사서 총총 기차를 타러 갔다.

    기차 안에서 먹는 크로아상의 맛은 끝내줬다. 겉은 바삭바삭, 속은 촉촉한 버터향 진한 크로아상은 쓰디 쓴 에스프레소와 아주 잘 어울렸다. 평소에는 쓴 한약 같던 에스프레소가 고소하게 느껴져서 놀라웠다.


    기차는 리옹역을 떠나 안시역으로 향했다. 안시는 알프스 산맥 부근 스위스와 프랑스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데 리옹에서는 기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나는 안시역에 도착해 곧장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중세 시대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안시의 구시가지, 마을 구석구석 나있는 기다란 물 길을 따라 걸었다.

    푸르른 옥빛으로 반짝이는 운하 주변으로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아치 모양의 다리가 군데군데 놓여져 있었고 색색의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너무 아름답고 낯선 풍경을 마주하게 되면,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안시의 구시가지도 그랬던 것 같다.


    처음 안시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껴있었고 곧 비가 내릴 듯 들이 마시는 공기가 축축하게 느껴졌다. 나는 구시가지를 걸어 다니다가 어느 카페 야외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했다. 내 앞으로 긴 운하를 따라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무척 힘들었나보다. 카페에서 그 어떤 사진도 하나 찍어 놓지를 않았다.

    나중에 기억하고 싶어서 먹었던 음식들을 다 찍어놨었는데, 왜 여기서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때의 장면은 아직까지도 내 뇌리에 박혀있는지 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내가 앉았던 하얗고 동그랗던 테이블 그리고 앞에 흘러가던 물, 그리고 그 테이블에서 일기를 쓰고있던 내 모습. 따뜻한 우유가 몸 속으로 사르르 들어왔다. 시나몬 가루가 입 안에서 까끌거렸다. ​


    갑자기 비가 후두둑 쏟아졌다. 우산을 가져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호텔을 나가려는 순간 가방에서 우산을 빼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테이프 되감기를 하듯이 과거로 돌아가 우산을 가방 안에 다시 넣고 싶었다. 아직 안시를 더 둘러봐야하는데 어느 한 곳에 틀어박혀 비를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그쳤고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음악을 크게 들으며 안시 호수를 옆에 끼고 나홀로 걸었다.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까 비가 내린 탓인지 조그만 물 웅덩이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호수 위로 많은 보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안시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왔다면 보트를 타보고 호수에서 수영도 해봤을텐데, 이 아름다운 호수를 눈으로 보기만 하고 지나쳐서 아쉬웠다.


    알프스 산맥이 호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안시 호수를 가득 채운 물은 빙하가 녹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더 맑고 깨끗해 보였다. 풍덩- 저 물 속에 몸을 담그면 내가 정화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날이 개었는지 파란 하늘이 호수 위에 담겨 있었다. 호수 위에서는 잔잔한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물방울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날씨가 좋아져 눈 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더 아름다워졌다. 내 기분도 덩달아 들떠 올랐다.​


    리옹역 근처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크로켓이 들어간 샐러드 하나와 콜라를 한 병 시켰다. 한국에서 늘상 자유롭게 먹던 물을 이곳에서는 돈을 주고 사서 마셔야 했다. 유럽의 물은 석회 성분이 많아 생수를 많이 사먹는다고 들었다. 여기서 물을 사 먹으려니 왠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콜라를 주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음식들이 기름지고 느끼해서 그런지 콜라와 찰떡궁합이었다.

    가볍게 먹으려고 샐러드를 시켰는데 양이 꽤나 많았다. 샐러드는 항상 간식이나 곁들이는 음식으로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같이 나온 빵과 곁들어 먹으니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


    배를 든든하게 채운 뒤 식당을 나섰다. 리옹역으로 돌아가는 기차 출발 시간이 꽤 남아서 조금 더 안시를 둘러보다 가기로 했다. 백조들이 햇살 가득 머금은 푸른 호수 위를 지나다녔다. 조그만 아기 백조들이 어미를 졸졸졸 따라 다니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나는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고 일기를 끄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 걱정도 고민도 없는 그저 평화롭기만한 따스한 오후였다.


    잘 있어 안시, 마음 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네고 리옹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리옹역에는 오후 7시 즈음에야 도착할 예정이었다. 어찌나 피곤하던지 기차에 오르자마자 곧장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잠에 들려고 하면 타타타타- 노트북 타자 소리가 귓가에 훅 꽂혔다. 내 옆쪽에 앉은 중년의 여자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귓가에 이어폰을 꽂고 다시 잠을 청했다.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 때마다 보이는 기차 밖 풍경은 똑같은 모습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푸른 하늘과 구름들, 처음에는 이 풍경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는데 계속 바라보니 이내 질려 버렸다.

    하늘에 초승달이 어렴풋이 보일 때 리옹역에 도착했다. 호텔에 돌아왔는데 배가 출출했다. 미리 사두었던 사과 한 쪽과 과일 쥬스로 배를 채웠다. 이날 밤, 난 컵라면이 무척 먹고 싶었다. 그리고 매콤한 김치찌개!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였다. 한국에 돌아가서 원없이 고춧가루와 마늘 듬뿍 들어간 국물을 흡입하리라 다짐하며, 하루는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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