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멈췄다 그러던 날, 기장에 있는 아홉산 숲을 찾았다. 어느 문중이 가꾼 아홉산 근처의 아름다운 숲이었다. 입장료는 1인당 5천원이었고, 오후 5시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다.
만개한 하얀 목련이 입구에서 우릴 반겨 주었다. 아홉산이라는 이름이 특이했는데, 아홉 골짜기가 있는 산이라하여 '아홉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숲 안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부터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다. 길쭉하게 솟아오른 새파란 대나무들이 이어진 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대나무가 이리저리 휘어지며 끼이익 소리를 냈다.
이파리들이 부딪히는 소리, 끼이익거리는 대나무 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신비로웠다. 무협 영화 한 편을 여기서 찍어도 되겠는걸? 맨들거리는 대나무 대를 매만져보며 길을 건너왔다.
우리가 느끼기에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천히 올라가면 어느새 고지에 올라와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만났는데, 나무 하나하나 수형이 아름다워서 첫눈에 반했다. 일제시대 때 수탈당할 뻔한 소나무들을 문중이 지켜낸 것이라고 한다.
드디어 대나무 숲에 닿았다. 입구 쪽에 있던 대나무 길과는 차원이 다른 그런 숲이었다. 이 대나무 숲이야 말로 진정 '숲'이라 부를만했다. 숲 안을 들여다보면 대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숲 안쪽에 커다란 돌 두개가 세워져있었다. 왠지 저 안에 서서 주문을 외우면 다른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할 것 같았다. 차원의 문 같았다고 해야하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삼각대를 세워 놓고서 돌 옆에서 사진을 찰칵 찍었다. 저 돌 옆에 서서 대나무들을 바라보니 영험한 기운이 샘솟았다.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들이 바람에 흔들거리는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곧이어 하늘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비가 마구 쏟아졌다. 소나기가 내려서 우산을 펴고 대나무 숲을 걸어야했다. 대나무 숲 부근은 바닥이 거의 흙이라서 비가 오니 길이 찐득하게 변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쏟아져내리는 비가 모든 소리를 먹어버린 것 같았다. 걷는 내내 귓가에는 비오는 소리만 들려왔는데, 그 순간이 무척 평화롭게 느껴졌다.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세상에 비와 나만 남은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대나무 숲 안쪽으로 나있는 길이 있어서 걸어 내려가보았다. 왠지 영화 속에서 몇 번은 보았던 것 같은 그런 풍경이었다. 하늘로 솟은 대나무는 그 끝이 어딘지 알기 힘들 정도로 하늘로 뻗어 있었다. 이 대나무들은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던 것일까?
비가 많이 내려서 대나무 숲을 돌아보고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내려가는 길은 지름길을 이용해서 내려갔다. 지름길은 더 가파르지만 빠른 길이었고, 주위에 대나무가 솟아 올라 있어서 경치가 더 좋았다.
입구쪽으로 돌아오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흐리멍텅한 하늘은 파랗게 변해 있었다. 하루새 어쩜 이렇게 날씨가 왔다갔다하는지, 변덕스런 날씨가 믿기지가 않았던 날이다.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니 촉촉히 젖은 정원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대나무 숲도 멋있었는데 입구 쪽 정원도 끝내줬다. 오랜 시간 공들여 가꾼 정원 같았다.
수형이 독특한 오래된 배롱나무와 곧게 뻗은 후박나무, 거북이 등껍질을 닮은 대나무, 봄이 되면 보랏빛 꽃이 피어날 등나무까지 정원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많았다. 계절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뽐낼 나무들, 계절마다 이곳을 찾으면 때마다 풍경이 다르겠구나 싶었다.
비가 그쳐서 멀리 뾰족하게 솟은 산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구름이 산에 걸려 있어서 산이 하얀 수염을 단 것 같았다.
흐드러지게 핀 목련과 인사하며 아홉산 숲을 떠났다.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을 듯한 아홉산 숲. 봄에는 등나무 꽃을 보러 와야겠고 여름되면 배롱나무 꽃을 보러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