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리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왔다. 어쩌다가 내가 하화도를 알게 되었는지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봄에 하화도를 거닐었던 기억이 너무 좋았어서 여름에 하화도를 다시 찾았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을이 되어 또 다시 아름다운 꽃섬 하화도를 찾게 되었다.
이제는 뭔가 이숙해진 배를 타고 하화도로 향했다. 백야도에서 8시 30분 배를 타면 제도와 개도를 지나 1시간 남짓 시간이 흐른 후에 하화도에 도착하게 된다.
반가운 하화도.
우리는 봄에 걸었던 것처럼 낭끝 전망대쪽을 둘러 마을로 내려와 점심을 먹고 야생화 공원쪽을 둘러보다가 돌아가기로 했다. 먼저 하화도에 하나뿐인 카페에 들러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 아웃 했다. 가을날이었지만 날이 꽤 더웠다.
마을 정자를 지나 언덕 위를 올라갔다. 이길은 낭끝 전망대 쪽으로 갔다가 멀리 막산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탐방로 중 하나다. 언덕 위로 오르면 더 오를수록 바다가 멀어졌다. 아직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서 있는 듯 했다. 언덕을 올라가니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길가에 핀 하얀 구절초들이 가을이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막산 전망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마을로 내려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우리가 하화도를 찾을 때마다 들렀던 꽃섬 식당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화도에 오기 전부터 맛난 해물쌈밥을 먹을 생각에 두근두근 했었다.
사람들이 별로 지나다니지를 않았는지 아니면 그새 많이 자란 것인지 트레킹 길 위로 잡풀들이 무성했다. 예전에 하화도 꽃섬길을 걷다가 큰 뱀을 한 마리 본 적이 있어서 조심하면서 걸었다. 언덕길을 벗어나니 이에 좀 걸을만했다.
어느정도 걸었을까 너른 초지에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었고 멀리 바다가 보였다.예전에 봄에 왔을 때 이곳에는 노란 금계국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하다. 봄의 기억을 안고서 기대를 품고 걸었는데 가을 코스모스가 우릴 반겨주어 무척 행복했다.
이날은 우리 부부가 만난지 딱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십주년을 기념하며 코스모스 꽃밭에서 기념 사진고 동영상을 남겼다. 2011년 10월 4일에서 시작된 만남이 2021년 10월 4일에 이르렀다. 오래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21년 10월 4일 오전 10시 4분을 기다리며 카운트 다운을 했다. 오, 사, 삼, 이, 일! 10주년을 자축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은 파랗다가도 하얀 구름으로 꽉 끼어 있었다. 내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서 하늘의 모습이 달랐다. 찌뿌둥한 하늘 아래 바다는 은가루를 섞어 놓은 것처럼 뿌앴다. 가을이라서 선선할 줄 알았는데 아직 여름처럼 더운 가을이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여기저기서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날씨는 여름이었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은 가을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억새들이 바람결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작은 잠자리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고 멀리 언덕에는 노랗게 영근 강아지풀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리고 바다와 빨간 피아노. 영화 속 한 장면 같던 풍경이었다.
걷고 또 걸었다. 간간히 부는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걷기 전에는 몰랐는데 예전에 걸었던 길을 걷다 보니 옛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아, 여기는 지나갔었던 곳이다 하고 과거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번득였다. 왠지 모든 것들이 그대로인 것 같아 반가웠다.
하화도에 오면 보고 싶던 풍경이 하나 있었다. 꽃섬길 트레킹을 하다가 잠깐 언덕 위에 멈춰서면 보였던 풍경이었다. 바다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던 아름다운 섬의 모습,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편안해졌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지난 봄에 이 풍경을 바라보며 한참 시간을 보내다 갔었다.
이번에도 한동안 철푸덕 땅 위에 앉아 먼 바다와 섬과 파도를 바라 보았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들려올 뿐 주위는 고요했다. 언제까지 저 풍경이 그대로일까 생각했다. 우리가 하화도를 처음 찾았을 때가 봄이었고 벌써 가을이 되었다. 우리는 벌써 많이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구름이 꽉 껴있던 하늘 아래 바다는 은빛으로 반짝였다. 푸르른 바다도 이쁘지만 이렇게 은은한 빛깔의 바다도 참 아름다웠다. 하얗게 피어난 거품들이 바다 위를 휘휘 떠다녔다. 이렇게 바다를 원없이 보며 계속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섬 트레킹의 묘미인 것 같다.
드디어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멀리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아래로 쭉 하염없이 내려가면 우리가 배를 타고 들어온 항구가 나온다. 우리는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마을로 돌아가기로 이미 정해둔 터였다.
우리는 내리막길을 걷고 걸어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섰다. 우리의 목적지는 꽃섬 식당. 하화도에 오기 전 이곳에서 먹을 점심을 얼마나 고대 했던가! 하화도를 찾을 때마다 찾아갔던터라 이제는 내 몸이 길을 알았다. 우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두 테이블 정도 이미 식사를 하고 계셨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해물쌈밥을 주문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은 상추가 다 떨어져서 생선구이만 된다고 하셨다. 저번에 생선구이를 먹어서 이번에는 맨 처음 들렀을 때 먹었던 해물쌈밥을 먹으려고 잔뜩 기대하며 왔는데 아쉬웠다. 그래도 생선구이도 맛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주문하고 기다렸다.
참돔, 볼락 그리고 달고기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져 나왔다. 참돔과 볼락은 말할 것도 없이 맛있었는데 의외로 괜찮았던게 달고기였다. 생선마다 각기 향과 식감이 달라서 즐겁게 먹었다. 반찬들도 하나같이 다 맛있어서 조밥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배부르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야생화 공원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하화도 고양이들은 나른한 낮잠을 자고 있었고 곳곳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많이도 피어 있었다. 바다는 섬들로 다 막혀있어서 그런지 아주 잔잔하고 고요해서 호수 같이 보였다.
야생화 공원에는 하얀 구절초들과 코스모스들이 피어 있었다.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 있어서 왔던 곳이었지만 또 새로웠다. 여름에는 붉은 나리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던 자리에는 분홍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었다.
야생화 공원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어느 정자에 멈춰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저 먼 바다 위에는 우리가 배를 타고 들렀다 온 개도가 보였다. 개도는 하화도 보다 훨씬 큰 섬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개도에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화 공원에서 언덕 길을 오르고 오르다 보면 구절초 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사실 정확히 이곳이 구절초 정원인지는 확신이 없다. 하화도 안내 지도를 보면 왠지 이곳이 구절초 정원인 것 같았다. 구절초 정원에 다다르면 구절초가 가득 피어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가을 구절초가 이쁘니 기대를 품고 왔는데 아쉬웠다.
구절초 대신에 이쁘장한 코스모스들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언덕 길을 오르며 땀을 줄줄 흘렸는데 바다 쪽 전망대에 서니 무척 시원했다. 어디선가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와 우리 더위를 식혀 주었다. 지난 여름에도 우리는 이곳에 서서 한참 더위를 시키다 걸었었다.
예전의 기억들이 오버랩되면서 더욱 이곳이 반가웠다. 우리는 절벽 끝에 퍼지는 하얀 파도들을 멍하니 바라 보다가 또 멀리 섬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섰다.
우리는 다시 낭끝 전망대 쪽으로 걷다가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 초입에 있는 부녀회 식당에서 부침개와 막걸리를 먹고 백야도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 하화도를 떠나기로 했다. 식당 앞에 귀여운 고양이들이 늘어진 채로 누워 있었다. 몇몇 고양이들은 고무 대야에 담긴 물을 핥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하화도를 몇번이나 찾았는데 이렇게 고양이가 많을 줄은 몰랐다.
부침개와 함께 개도 막걸리를 먹었다. 여수 근방의 섬들 중에서 양조장이 있는 곳들이 몇몇 있다. 낭도와 개도가 그 중 하나인데 낭도 막걸리는 더 생생한 느낌에 시원한 맛이라면 개도 막걸리는 좀 더 진하면서도 달달한 맛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낭도 막걸리가 더 맛있었으나 식당에서 주신 개도 막걸리가 꽝꽝 얼었다 녹아 살얼음이 사르르 떠있어서 그 어느 막걸리 보다도 맛있게 먹었다. 술을 마실 때 그 온도도 참 중요한 것 같다.
귀여운 고양이들이 식당 안에 수시로 왔다 갔다 거렸다. 솜방망이 같은 작은 발이 어찌나 귀엽던지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 생각은 많이 했었는데 끝까지 지켜줄 용기가 없어서 주저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렇게 고양이들을 보고 나면 또 마음속에 고양이를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는다.
식당에서 부침개도 먹고 배도 기다릴 겸 한참을 있다가 배가 올 떄 즈음에 밖으로 나섰다. 올해만 벌써 하화도에 몇번을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 섬은 우리 부부와 인연이 깊어질 섬인가 보다.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될 즈음에 아마 이곳을 다시 찾지 않을까 싶다. 하화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