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날 우리는 합천을 찾았다. 억새를 보러 황매산에 찾아갈까 싶었지만 주말 주차 전쟁에 휩쓸릴까 싶어 말았다. 핑크뮬리가 이쁘게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소양 체육공원을 찾았다. 이곳도 만만찮게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찍 도착한 덕인지 주차할 자리가 있어 차를 쏙 세우고 체육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신소양 체육공원은 지난 봄에 작약 꽃밭을 보러 찾았던 곳이었다. 한창 봄이었는데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이 지나가면 또 겨울이 올테고 뒤이어 봄이 오겠지. 시간이 참 빠르게 느껴졌다. 가을날 체육공원은 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주 거대한 부지에 핑크뮬리가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핑크뮬리 밭 중간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솟아 있었다. 동그란 언덕 둘레를 따라 난 흙길을 따라서 언덕 위로 올라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걷고 나니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던 핑크뮬리가 흐드러지게 핀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 아래서 흔들거리는 핑크빛은 단숨에 내 눈을 사로 잡았다. 핑크뮬리 밭은 생각보다 더 넓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부지에 핑크빛깔 고운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핑크뮬리들은 부드러워 보였다. 새들의 깃털 같기도 하고 보드라운 솜털 같기도 했다.
하늘에 뜬 구름들은 몽실몽실 솜사탕 같았다. 언덕 위로 오르는 길에 고개를 들어 언덕 위 하늘을 보면 온 세상이 파랗고 하얗고 핑크빛이었다. 먼 하늘이 가까워 보여서 손을 뻗으면 하얀 구름이 잡힐 것 같았다.
우리는 뱅글뱅글한 길을 따라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핑크뮬리들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따라 걸었다. 걷고 걸어도 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핑크빛 바다 위를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날이 덥지 않았다면 아마 끝까지 걸었을 것 같다.
핑크뮬리가 가득한 길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주차장으로 되돌아가는 길, 꽤 넓은 억새밭을 만났다. 하얀 깃털같은 억새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핑크뮬리가 아무리 예뻐도 억새보다는 못한 것 같았다. 내가 고대하던 가을다운 풍경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억새들이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체육공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