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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라산 영실코스를 따라 찾아간 윗세오름 그리고 백록담우리나라 방방곡곡/제주도 2022. 2. 18. 11:32728x90반응형
새벽에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영실코스에 갈 작정으로 나름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었고, 자중하며 일찍 잠에 들었었다. 그런데 컴컴한 새벽 이렁나기 어찌나 힘들던지 모른다.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들고 싶어 침대 위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또 누웠다가 마지막까지도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털고 일어났다.
우리가 영실 매표소 지나 안쪽 주차장에 도착한 것이 새벽 6시가 넘은 시간 즈음이었다. 이미 차들이 주차장에 많이 있었다. 밍기적밍기적 숙소에서 주저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준비해 벌써부터 등산을 시작했다니, 마지막에 툴툴 털고 일어나 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새벽 산행을 시작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바로 시작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사건들 때문에 좀 지체되었다. 거의 7시 다되어서야 등산로에 진입했던 것 같다.
열심히 위로 오르다보면 더워져서 얇은 옷들을 겹겹히 입었었다. 그런데도 이른 새벽은 몹시 추웠다. 걷는 것을 잠깐이라도 멈추면 추위가 엄습해서 계속 걸어야했다. 눈이 소복히 쌓인 산은 아주 고요했다. 예전에 핀란드 로바니에미에 갔을 때 보았던 눈 쌓인 울창한 숲이 떠올랐다.
완만한 평지를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의 연속이었다. 눈이 쌓여서 계단처럼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고 눈이 녹아내려 아주 미끄러운 구간도 있었다.
40여분 정도 걸었던가? 드디어 영실 기암과 마주쳤다. 병풍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던 거대한 암석, 돌산의 줄기줄기마다 눈이 쌓여 있어서 아주 장관이었다.
온 세상이 다 내려다 보이는 것 같았다. 시원하게 뻥 뚫린 세상을 오랫동안 바라 보았다. 멀리 푸르딩딩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푸르른 바다와의 경계에만 흰구름들이 겹겹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인 것일까?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떠올랐다. 영실 기암 뒤에 가려져 있단 해기 솟아 오르며 세상을 훤히 비춰주었다. 해가 비치니 으스스한 몸도 좀 나아졌다. 따뜻한 햇살이 곳곳에 스며 들었다. 하얗게 서린 눈꽃 위에도 닿고 커다란 암석에도 닿고 우리에게도 닿았다. 햇살에 몸을 좀 녹이며 더 힘을 내서 으쌰으쌰 올라갔다.
오르막이 끝나고 이제 다시 완만한 길을 걷게 되었다. 구상나무가 우거진 길이었는데 길 도입부에 있던 나무들은 대부분 죽은 것들이었다. 허연 목대와 가지만 덩그러니 남은 모습들이 기괴하면서도 신기했다.
구상나무는 우리 고유의 특산종이라고 한다. 한라산이나 지리산, 덕유산 등지에서 자라난다. 그 이름은 제주도 방언인 쿠살낭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쿠살이 성게를 뜻하고 낭이 나무를 뜻하는데 이 방언이 흘러흘러 구상나무가 된 것이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이제는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나무로 사랑받는다고 한다.
어느정도 걸었을까 멀리 새파란 하늘 아래 거대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와, 이 거대한 돌산은 바로 백록담이었다. 날이 맑아서 백록담이 아주 시원하고 선명하게 잘 보였다.
예약이 꽉 차있어서 정상코스 등반을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이렇게라도 백록담을 보니 어부지리로 한라산 정상에 오른 느낌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새벽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에 오르길 참 잘했다. 이리도 아름다운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날은 이찌 이리도 맑은지 하늘에서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것 같았다.
우와,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내가 어디 먼나라의 히말라야 산맥 위 고산지대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눈앞에 커다란 백록담이 있다니 너무 아름답고 멋있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눈쌓인 백록담, 그저 황홀했다.
백록담을 앞에 두고 걸어가는 길, 오른쪽을 바라보면 푸르른 바다가 보였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래서 구름이 없었다면 그 경계를 알기 힘들었을 것 같다. 어디가 바다고 어디가 하늘인지, 우리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와 있었다. 떠오른 해가 바다 위에 비쳤다. 태양 아래 바다는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하얀 언덕이 쭉 이어졌다. 켜켜히 쌓인 눈 때문에 온통 하앴다. 그리고 구름 없는 새파란 하늘, 하얀 언덕과 새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순백색의 아름다운 눈의 세상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윗세오름에 있는 대피소였다. 여기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했기 때문이다. 추웠던 몸도 녹이고 맛있는 라면도 먹을 생각이었다. 곧 목적지에 닿을 것이라 생각하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대피소 안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밖이 추워서 그런지 안에서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밖에서 눈을 바라보며 먹어도 좋았곘지만, 으스스 한 추위에 몸을 녹이고 싶었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와 짐을 내려 놓고 텀블러 안에 고이 모셔온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담았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도 들렀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대피소 근처에서 윗세오름 비석을 발견해 기념으로 찍어 두었다. 해발 1,700m라니, 구름이 발 아래 있는 것이 놀랍지 않을 높이였다.
윗세오름에 오는 코스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실 기암을 거치는 영실코스 다른 하나는 어승생악 오름을 지나는 코스이다. 우리는 차를 끌고 영실매표소 쪽으로 왔기 때문에 영실코스로 올랐다가 동일한 길을 내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풍경을 보기 위해 영실코스로 올랐다가 어승생악 코스로 내려가기도 하고 그 반대로 가기도 하더라. 우리도 다음번에는 어승생악 코스로 올라보기로 했다. 윗세오름 대피소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승생악 코스로 이어지는 길이 있길래 잠깐 맛뵈기로 걸어 보았다.
다시 왔던 길을 따라 하산하는 길, 올라오며 보았던 풍경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해는 중천에 떴는지 바다는 더 새파래졌다. 수평선에 낀 구름이 없었다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몰랐을 것이다. 마치 하늘 위에 떠있는 섬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것은 바다와 하늘 뿐이니 말이다.
백록담 안녕!
언젠가는 정상위에 서서 백록담을 바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백록담을 뒤로하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서 다시 구상나무 숲에 들어섰다.
해가 떠오르니 이제 꽉 껴입은 옷들이 덥게 느껴졌다. 입고 있던 패딩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패딩을 벗으면 짐이 되니 꿋꿋하게 계속 입고 하산을 했지만, 정말 더웠다. 왜 얇은 옷들을 겹겹으로 입고 가라는지 알 것 같았다. 아침에는 너무 추워서 이 패딩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 그랬었는데 순식간에 애물딴지가 되어버렸다.
구상나무 숲을 지나서 영실 기암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멀리 내려다 보이던 풍경이 어찌나 멋있던지 모른다. 산을 오를 때는 숨을 헐떡이며 잠깐 쉴 때서야 뒤돌아 풍경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런데 내려갈 때에는 계속해서 멋드러진 풍경을 바라보며 갈 수 있으니 더 좋았다. 몸도 덜 힘들고 보이는 풍경은 더 멋있고. 이래서 산을 타는 것일까?
구름이 눈앞에 있으니 내가 구름만큼 높이 올라와 있는 것일테다.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니 마음이 가벼웠다. 올라오는 사람들은 몹시도 더운지 땀을 흘리며 웃옷을 벗어 던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새벽부터 일찍 이곳에 와서 정말 다행이다. 먼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사람들은 작은 점처럼 보였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높은 곳에 서서 내려다 보니 제주도에 오름이 얼마나 많은지 알 것도 같았다. 아주 멀리 바다가 보이고 내려다 보이는 땅 위로는 크고 작은 오름들이 가득했다. 작은 분화구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던 오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영실 기암을 지나서 쭉 끝없이 이어진 계단과 내리막 길을 따라 내려왔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서 아이젠을 끼고 있어도 몇 번 넘어질 뻔 했다.
내려와서 한동안 나무들로 둘러싸인 눈 덮인 평지를 걸었다. 눈오리 만드는 플라스틱 도구를 짐이 될까봐 두고 왔는데, 그냥 들고와도 될 걸 그랬다. 아쉬운 마음에 남편은 맨손투혼을 발휘하며 눈을 뭉치고 다듬더니 귀여운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냈다. 나뭇가지로 손을 만들어주고 조릿대 이파리를 머리 위에 하나 얹어 주었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을 옆에 끼고 걸었다. 돌 틈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눈 쌓이고 고드름 맺히는 참으로 겨울다운 풍경을 마음껏 보며 이 겨울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다.
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때가 이른 아침 7시 즈음이었던 것 같다. 주차장에 내려와서 시계를 살펴보니 오후 1시 30분이 지나가 있었다. 무려 6시간 정도 한라산에 있었다. 차에 올라 시트에 앉으니 살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거려서 오늘 하루는 밥 먹고 숙소에 가서 푹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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