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랗게 펼쳐진 하늘이 아름다운 겨울날 우리는 거재 둔덕기성을 찾아갔다. 둔덕기성은 우봉산 자락 해발 300m 즈음에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차로 좁은 임도를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중간 즈음에 차를 멈춰 세우고 우리는 걸어 올라갔다.
둔덕기성까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지만, 날이 참 좋아서 산 속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잠깐 걸어보고 싶어 중간에 멈췄다.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작은 숲 길을 따라서 걸었다.
1km가량을 걸어갔던 것 같다. 가는 길에 나무 가지마다 남파랑길 표식이 달려 있었다. 남쪽 섬들을 잇는 둘레길들을 남파랑길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 남파랑길 코스를 차근차근 걸어보아야겠다 생각했다.
길 주변에는 유독 편백나무들이 많았다. 편백나무들로 조림한 숲에 가보면 깔끔하게 아래쪽 가지들이 다 정리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편백나무들은 날 것의 그대로인 모습이었다. 축 늘어진 가지들이 땅바닥에 닿을 듯 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추워져서 한발자국도 걷기 힘들 것이다. 이날은 가리는 구름이 없어 따스한 햇살을 그대로 받아 걷는 내내 포근했다. 나무들이 바람을 가려 주어서 더 따뜻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드디어 둔덕기성에 도착했다. 작은 안내판을 보고 대충 구조를 파악한 뒤에 성 위로 올라갔다. 넙적하고 평평한 돌들이 겹겹이 쌓여 커다란 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 성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져 그 이후로 계속 사용하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 옛날 이리도 높은 곳에 올라와 성을 쌓았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성 위에 오르니 세상이 내 발 밑에 있는 것 같았다. 멀리 굽이굽이 진 산들과 논과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우뚝 솟은 산방산의 봉우리가 보이기도 했다. 하늘을 가르는 바람이 온몸을 휘감으며 지나갔다.
고려시대 의종, 무신정변이 일어나 의종은 이곳 둔덕기성으로 피신와 3년간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선 초 고려왕족들이 유배를 와서 지냈던 곳이라고도 한다. 뭔가 다양한 이들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겠구나 싶었다.
언덕 위는 초지였고 군데군데 나무들이 서 있었다. 집수지, 석환군, 저장고 등 둘러보면 옛 성의 흔적들이 꽤나 남아 있었다. 성 안을 둘러보다가 성곽쪽으로 나아가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성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푸르른 바다와 작은 섬들과 고즈넉한 마을의 모습,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성곽 주변에는 사람들이 쌓아 올린 돌탑들이 가득했다. 이름 모르는 이들의 다양한 소망들이 이루어졌으려나?
성곽 위에 올라 서서 기념 사진들을 남겼다. 바람을 막아주는 나무나 건물이 없어서 온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야했다.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코가 주욱 흘러내리기도 했다. 이 높다란 산 위에서 갇혀 사는 기분이란 어떨까? 저 푸르른 바다를 보면 뛰어들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하다.
언덕 꼭대기에는 작은 솔숲이 있었다. 고고하게 솟은 소나무들이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우리는 언덕 위를 올라가보았다.
언덕 위에 서니 성 안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다. 먼 산이 내려다보이고 소나무들 사이사이로 나무 그림자들이 일렁였다.
잠깐 솔숲 아래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멀리 푸르스름한 바다가 보였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이 부는 소리만 들려왔다. 바다는 너무 멀어서 파도 부대끼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 넓은 성 안에 우리 둘 뿐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벤치 위에 앉아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몸이 으슬으슬 추워질 때면 텀블러에 담아온 뜨거운 물을 종이컵에 부어 차를 우려 마셨다. 차를 호로록 마시고 먼 바다를 바라보고, 또 호로록 마시고 건너편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려가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한번 휘익 돌아보고 푸르른 하늘도 바라보고. 걸어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길보다 수월하게 느껴졌다. 십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아는 길을 걸어가서 더 빠르게 느껴졌던 것 같다.
길 주변에 오래된 벚나무들이 많아서 꽃피는 봄날에 이곳을 찾아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어 한적하고 풍경이 아름다워서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곳이다.